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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흑백의 힘: 자산어보, 카프카, 이레이져 헤드
    영화 사담 2021. 5. 5. 13:02

    부제 - 내가 최근에 본 흑백 영화들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에 처음으로 컬러TV 방송이 시작됐다. 다른나라에 비하면 한참 늦게 컬러 방송이 시작된 편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흑백 영상은 구시대의 것이라는 일종의 편견이 남아있는 것 같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요즘 나오는 흑백영화는 예술영화'라는 주변의 의견을 흔치 않게 마주하게 되는데, 예술영화가 상업영화보다 전통적인 영화 연출 방식을 재현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역시 흑백=옛것이라는 공식을 세우는 데에는 무리가 없어보인다.

     

    그렇지만 흑백은 제법 세련된 연출 방식이다. 그것은 관객에게 형형색색의 아름다움을 제공하지 않고 절제된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보여주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흑백 화면에서는 인물의 감정이나, 옷의 질감을 잘 볼 수 있고,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명암대비가 강한 화면에서는 긴장감을, 부드러운 화면에서는 편안함을 넘어서 따뜻함까지 느낄 수 있다.

     

    오늘은 내가 최근에 본 흑백 영화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 하려 한다. 이야기의 짜임이 어떻고, 인물의 연기는 어땠고 등등을 언급하는 비평이나 리뷰는 아니다. 오로지 흑백 연출만을 논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영화는 이준익 감독의 <자산어보>, 스티븐 소더버드 감독의 <카프카>, 데이빗 린치의 <이레이져 헤드>.

     

    자산어보, 흑백 영상이 주는 아름다움의 극치

     

    흑백과 세피아 톤. 세피아 톤이 더 따뜻한 느낌을 준다. 사진은 조 크라비츠.

     

     

    영화에서 보여주는 시대 속 다양한 인간 군상에 대한 이야기. 창대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사람들과 흑산도의 일상을 멀리서, 또 가까이서 지켜보는듯한 영화다. 영화는 흑백으로 연출됐는데, 이야기가 따뜻하게 연출돼서 그런지 자동으로 영상이 세피아 톤으로 보인다. 사실 여기까지만 보면 굳이 흑백 연출이 필요할까? 싶을 수도 있다.

     

    영화에서 흑산도에서의 생활이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흑백이 주는 영상의 아름다움이 도드라진다. 파도의 하얀 거품과 까만 바닷물, 울퉁불퉁한 바위, 흑산도 어부들의 꾀죄죄한 옷, 매끈한 물고기의 피부 등 흑산도의 다양한 경관들이 오로지 질감으로만 전달된다. 특히 극장에서 보면 옷의 질감, 피부결 같이 아주 가까이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을 흑백으로 크게 볼 수 있어 더 좋았다.

     

    사실 이 모든 것들은 단순히 흑백 필름을 써서 가능한 게 아니라, 빛과 구도 등등을 세세하게 연출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준익 감독은 초반 유배 장면에서는 화면의 명암 대비를 강하게 하고 어두운 화면을 사용해 암울한 분위기를 강조했고, 흑산도에서는 주민들의 옷을 보다 더 거친 느낌으로 연출했다. 이런 연출은 관객이 영상에 싫증을 느끼지 않고, 쉽게 몰입할 수 있도록 돕는다.

     

     

     

    요건 내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한 중고 서점에서 찍은 사진이다. 개인적으로 명암 대비가 더 있었으면 했는데 부드러운 느낌으로 나와 조금 아쉬운 사진이다.

     

     

     

    영화 <자산어보> 스틸컷

     

    요건 자산어보 스틸컷인데, 창대의 옷이 아주 낡아보이고 물에 젖어 어두운 상태라 화면에서 도드라져 보인다. 뒤에 가거댁의 밝은 옷과는 대비가 되면서도, 다시 배경에 울퉁불퉁한 돌담 덕분에 지나친 느낌 없이 조화로운 화면이다.

     

    영화 <자산어보> 비하인드 컷

    내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 하는 비하인드 컷. 따뜻한 느낌이 (사실은 그렇지 않음에도) 세피아 톤으로 연출된 느낌이 든다.

     


    카프카, 컬러 시대의 흑백 연출

    영화 <카프카> 스틸컷

    작가 카프카의 대표 작품 '변신'과 그의 생애를 적절히 픽션으로 섞어낸 영화다. 과거 모더니즘 시대의 인간 이성에 대한 맹신, 혼란스러운 사회, 그 속에서의 개인의 선택을 다루었는데, 중요한 것은 여기서 흑백 화면과 컬러 화면으로 바꾸어 연출한 장면이 아주 탁월하다는 점이다.

     

    (스포 주의)

    영화는 후반부에 카프카가 '성' 안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줄곧 흑백화면으로 보여진다. 카프카가 살고 있는 세계는 혼란스럽고, 도심의 풍경은 답답하기만 하다. 소심하고 예민한 성격의 카프카는 다른 수많은 사람들과 나란히 앉아 타자기를 만지작거리며 그저 그렇게 살아간다.

     

    어쩌다 사라지는 자신의 옛 친구들에 대해서 함부로 얘기해서는 안 되고, 어쩐지 자신만을 빼고 돌아가는 것 같은 세상.카프카는 소심하지만 용기를 내고, 어쩌다 운이 도와 무사히 '성' 안으로 들어간다. 온갖 문서가 쌓여 있는, 그리고 바깥 세상들은 모르는 괴상한 실험이 이루어지는 곳. 권력의 성이다. 그 곳은 답답한 카프카의 세계와는 달리 컬러가 존재하는 곳이다.

     

    그렇지만 그 곳에서 자행되는 폭력과 야만에 무력감을 느낀 카프카는 다시 자신이 살던 흑백의 세계로 돌아간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자신이 호감을 느꼈던 동료의 죽음 (그것도 타살이 명확한 죽음)을 '자살임에 틀림 없다'며 외면하고 살아간다. 진실을 알게 된 카프카는 더 이상 세상이 궁금하지도 않고, 그에게서 더 이상 어리숙한 모습을 볼 수도 없다.

     

    https://youtu.be/YWFHeDcVNiw

    유명한 <오즈의 마법사> (1939)의 흑백(세피아)-컬러 전환 씬.

    사실 이런 흑백-컬러 전환 효과가 예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진작에 컬러 기술이 발달했던 할리우드에서는 이미 이런 환상적인 장면을 만들어 기술력을 관객에게 과시했다. 이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에 이 장면에서 관객들의 반응이 어땠을지 너무 궁금하다..

     

    그렇지만 카프카의 흑백-컬러 전환 장면이 중요한 이유는, 간단한 컬러 영상 삽입만으로도 장소, 시대, 이데올로기의 전환, 혹은 구별을 관객들에게 설명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불합리한 관료제의 세계 (성 안)과 혼란스럽고 딱딱한 도시 생활 (카프카의 세계)가 컬러-흑백으로 구별되면서 역설을 만들어내는 점이 인상적이다. 보통 컬러 화면은 기술의 진보, 더 나은 세상, 환상, 꿈 등을 나타내는데, 이 경우에는 컬러 화면의 세계가 더 폭력적이고 잔인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도 사전 정보 없이 봤다가 컬러 전환되는 거 보고 진짜 기겁했다. 감독에게 합격의 목걸이 줬어야함 솔직히.


    이레이져 헤드, 불안과 악몽, 그리고 무채색의 꿈

    이레이져 헤드의 주제를 요약하자면 이 정도가 되겠다. '미혼 커플의 육아일기'. 당연하게도 개 막장이다. 준비되지 않은 임신과 그에 따른 책임, 그것을 떠맡았을 때의 불안과 혼란 등등을 아~주 추상적인 영상으로 표현한 게 바로 이 영화다. 어렸을 때 이 영화를 봤을 땐 내가 너무 어리고, 이런 주제랑 전혀 상관 없었기 때문에 보면서 '와 완전 난해하고 이상하다'는 생각밖에 안 했는데 지금 보니 대충 어떤 생각으로 이런 표현들을 한 건지는 알 것 같다.

     

    이 영화는 장면 하나하나를 이해하려 하면 안 된다. 그냥... 보다가 왠지 기분나쁘게 느껴지는 장면들 (외계인 같이 생긴 아기, 이상한 인조 치킨 등등)을 봤을 때 드는 '그 생각들'이 맞는 것이다. 내 생각에 데이빗 린치 작품을 해석 찾아가면서 보는 건 영화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가오가 떨어지는 행동이다. 그냥 이해하지 말고 외워!!

     

    이레이져 헤드를 흑백으로 표현한 건 '신의 한 수'까지는 아니지만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가령 '이상한 치킨' 장면에서, 치킨에서 피 같은 액체가 나오는 장면을 연출한다고 할 때, 컬러였다면 진짜로 비위가 많이 상했을 거 같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데이빗 린치 할아버지가 흑백으로 연출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영화를 보다가 '아 저것은 요리할 때 넣었던 소스겠군' 하고 합리화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컬러로 본다는 게 잘 상상이 안 된다. 흑백 꿈을 꾸는 것 같다. 흑백 악몽.

     

    미국에서 60년대에 본격적으로 컬러 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전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꿈을 꾸었을 때 흑백 영상을 보았다는 연구가 있다. 우리나라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비슷하겠지 뭐. 사실 꿈을 꾸는 동안 영상이 실제로 어떤 색이었는지는 알 수 없고, 그냥 우리의 뇌가 꿈에 대해 다시 기억을 하면서 이런 저런 색을 입히는 것 아닐까 싶다. 어쨌든 흥미로운 일이다. 흑백으로 꾸는 꿈은 더 답답한 느낌일 것 같다.


    이상 첫 번째 개소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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