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여고괴담 - 메멘토 모리: 여성 청소년과 몸
    영화와 글 2021. 8. 19. 21:43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스틸컷.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다.

      사실 <여고괴담2 - 메멘토 모리>는 좀 구시대적인 영화다. 효신이가 다니던 학교와 지금의 학교는 2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만큼 많이 다르고, 이야기도 지금 보기엔 좀 촌스러운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여성애자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지적하지만, 그러면서도 레즈비언 연애를 지나치게 비극적인 사랑으로 낭만화 했다는 것도 덮어놓고 '잘했다'라고 할 수는 없다. 실제로 '여고 진학 전에 이 영화를 보고 낭만을 느껴 부러 여고에 진학했더니 애틋한 로맨스 같은 건 전혀 없더라'하는 영화 코멘트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까지 나온 여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 중에 <여고괴담2>만큼 여성 청소년 집단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은 없다. 영화가 나온 지 2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이를 뛰어넘는 작품이 없다는 건 슬프지만, 우선은 어떤 부분에서 <여고괴담2>가 여고생을 '사실적으로' 그렸는지 짚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미 영화에 기존의 비평이나 평가는 많이 있는데, 보통은 여고생을 '순진무결하고 해맑기만한 소녀'로 대상화하지 않고 선한모습 악한모습 우울한모습 기쁜모습 혼란스러운모습 앞뒤가다른모습 등등을 모두 보여준 - 어찌보면 당연한 게, 이 영화를 찍기 위해 감독들은 실제 여고생 400명과 인터뷰를 하고 연극반 여고생들과 워크샵도 가졌다. - 점을 좋게 평가한다. 하지만 여기선 조금 더 깊이 파고들어가, 여자 고등학교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여성 청소년들이 학습하는 이성애 중심적 섹슈얼리티와 그로 인해 그들이 경험하게 되는 자신의 몸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제한된 공간, 여고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현장 사진인듯. 아수라장인 게 완전 여고 교실 분위기다.

      왜 '여고'라는 공간이 특수하냐면, 청소년기에 성별에 제한을 두며 자아를 찾도록 교육하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이런 동일한 성별만 모아놓았다는 것을 이 글에서는 일종의 '제한'이라고 말하고 싶다. 청소년기에 지식의 습득만큼 중요한 게 있다면, 다양한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자아를 구성해 나가는 것이다. 내가 누구를 좋아하고, 어떤 사람 앞에서 어떤 모습을 보이고 싶은지를 알게 되는 것 역시 자신에 대한 탐구 과정일 수 있다. 하지만 여학교는 그런 자연스러운 과정이 일어날 수 없는 환경이다.

      물론 여학교를 나와도 연애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흔하기도 하다. 학원이나 동아리 같은 곳을 통해서 만날 길도 많고, 고등학생들끼리도 미팅을 여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여학교에서 가르치는 바에 따르면 여전히 연애는 '공부를 방해하고 지나치면 부적절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학교를 졸업하고 자신의 남자친구를 모교에 데리고 오는 졸업생 언니에게 따가운 시선을 보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과거에 여학교를 나왔던 사람의 개인적인 기억에 의존해서 쓰는 내용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여고의 보수성과 여성들만 있다는 특수성은 기묘하게 작용해 '연애'라는 행위 자체를 지금 당장과는 거리가 먼 미래의 것, 그렇기 때문에 자꾸 환상을 품고 바라보게 되는 이상한 분위기가 형성된다. 이는 학생들 스스로 연애에 대한 환상을 품는 것일 수도 있지만, 결국엔 이런 환상은 교육으로 인해 생기게 된다. 전통적인 여학교에서만 진행하는 예절 교육이나 가정 교육, 혹은 생활관에서 한복을 입은채 하루 머물며 하는 교육은 전부 '미래의 신붓감'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여고생의 이성애 섹슈얼리티와 몸에 대한 공포

     

      이런 교육 탓에 여고에서도 섹슈얼리티는 절대적으로 이성애만을 중심으로 한다. 이성애가 바로 절대적인 '길'이고, 다른 섹슈얼리티, 다른 형태의 사랑이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고 사실상 불가능한 영역이 된다.

      남자와 사귀는 것이 일종의 목표가 되지만 막상 학교 안에는 여자들만 득시글한 상황에서 여학생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자신의 몸을 탐색하는 것이다. 때마침 다른 표본(?)도 있겠다, 항상 자신의 몸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이성과의 연애를 위한 가장 이상적인 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물론 미래의 확실하지도 않은 이성 교제를 위한 일이다. 영화 속에서 이런 행동과 강박은 신체검사라는 이벤트를 통해 드러난다. 공개적으로 나와 타인의 신체를 소수점까지 알 수 있는 상황이 바로 신체검사다.

      민아, 연안, 지원은 가장 '보편적인 여고생'을 대변하는 인물들인데, 이 아이들에게 신체검사는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자신이 과연 '이상적(혹은 정상적)인 몸'의 범위에 들어왔는지 확인하기 위한 일종의 테스트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성애 중심적 세계에서 완벽하다고 여기는 '마르고 가슴이 작지 않은' 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완벽한 몸의 범위는 매우 좁고 단 한 톨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은 언제나 자신의 몸에 절망하게 된다. 그래서 신체검사는 일종의 공포다.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신체검사 씬. 가장 여고스러운 장면 중에 하나다.

      이렇게 강박적으로 학습된 이성애 섹슈얼리티는 너무나 강력해서, 여성 청소년 주위에 있는 그 모든 여자들은 전부 무성적 존재가 되어버린다. '남자'와 사귀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대학에 가면 남자를 사귀는 것이 지당하기 때문에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아이들은 여성이지만 한편으로는 성적인 것과는 관계없는 존재인 것이다. 이는 여고생이 여성 '청소년', 즉 성인이 되기 이전이라는 성장의 단계이자 (여고에서 유독 강조되는) '미완성/미성숙'의 단계에 속한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미성숙한 존재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무엇일까? 섹슈얼리티에 대한 자발적인 탐색이나 교육 없이 획일화된 관념이 형성되면 오히려 동성 간의 스킨십에서 성적인 긴장감은 무력화된다. 과거에는 여성 청소년들끼리 팔짱을 끼고, 손을 잡고, 껴안는 것이 성적 긴장이 없는 편안한 애무로 받아들여졌다. 전혀 이상하지 않고, '같은 성별끼리니까' 괜찮은 것, 그래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이에 관해 개인적으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여고에 다니던 시절에 있던 일이다. 나름 '덜 고지식했던' 철학 선생님은 사랑에 관한 교육을 하던 중에 '나중에 써먹으라'며 남성을 유혹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 방법은 이랬다.

    1. 옆에 있으며 말을 하다가 갑자기 팔짱을 낄 것

    2. 남성의 팔에 가슴을 밀착할 것

    3.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릴 것

    이런걸 생각하셨던 걸까? 정원이 군대얘기를 하는데 엄청 흥미로운 것마냥 팔짱을 끼고 '그래서요?' 하던 다림이처럼? 사진 - <8월의 크리스마스> 스틸컷

      이 무슨 쭉빵 스킬 같은 방법이란 말인가. 지금 보면 웬 쉰내 나는 말인가 싶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던 때가 미투 운동이 터지기 전인 2010년대 중반이고, 내가 다니던 학교가 보수적이어서 성적인 것에 유독 민감하고 부정적으로 반응했던 것을 생각하면,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충격이자 재미있는 유희였다. 어쨌든 수업은 끝났고, 선생님이 나가자 아이들이 갑자기 친구들에게 그 스킬을 써먹기(!) 시작했다. '왜 이걸 여자에게 하고있냐'라며 자조적으로 웃기는 했어도, 왜 그것을 남성에게만 사용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효신이는 떠날 수밖에 없었다.

     

    저 '뾰족한' 시선이 보이는가? 사진 -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스틸컷

      효신이는 뭔가 다른 존재다. 효신이가 다른 아이들에게 반감을 산 이유는 그 특유의 유별남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애들처럼 이성애에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효신은 자기만의 세계가 있고, 어딘가 서늘하고 성숙한 느낌이다. 그러면서, 혹은 그래서 이상한 행동을 한다. 일찍 남자를(그것도 학교 아이들이 좋아하는 남선생을!) 만나고, 시은이와 동성연애를 한다. 그리고 신체검사에 무관심하다. 여기서 효신의 유명한 대사도 나오지 않는가. '몸무게 몇 킬로, 키 몇 센티, 이런 숫자들이 내 성장을 설명해 줄 수 있을까?' 효신은 여기서 이성애적으로 욕망하는 것과 이성애 세계에서 완벽한 '대상'이 되기를 거부한다. 효신은 그런 것들에 무관심하고, 그렇기 때문에 배척받는다.

      효신은 탈선으로 비난받는데, 이는 (비록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너무 이른' 섹스를 했고, 게다가 레즈비언 연애까지 저질렀기 때문이다. 여학생은 남자의 눈에 맞는 큰 키(그렇지만 너무 크지도 않은 키), 호리호리한 몸, 큰 가슴을 원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러면서도 '지나치게' 먼저 남자를 만나서도 안 된다. 이 두 가지 법칙을 당당히 어긴 효신이는 아무에게도 속할 수가 없었다. 조금 재밌었던 점은, 효신이네 반 친구들이 자기들 끼리의 스킨십에는 별 성애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데도 효신이 자행했던 시은과의 스킨십 만큼은 성애적인 시선으로 바라봤다는 것이다. 이는 효신이 죽은 뒤 그에 대해 떠드는 장면에서 보이는데, 반 아이 중 한 명은 이 때 '키스고 뭐고 별 건 다 하고 죽었다'며 효신의 지나친 성숙함을 비난한다. 이상하게도 여기서만큼은 동성과의 키스가 성애적 맥락을 갖는다. 

      주요한 이성애 규범에 속하는 것에 회의감을 느낀 효신의 행동은 배척지만, 사실 효신 역시도 속으로는 외롭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주구장창 일기만 쓰는 것에서 그것을 엿볼 수 있다. 시은이와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도 씩씩 화를 내면서 일기를 펼치는 모습에서도 효신의 유약한 면이 드러난다. 효신의 복잡한 마음 속과 아이들과의 관계는 국어시간 장면에서 잘 드러나는데, 마치 이상의 시와 같은 파격적인 시를 아이들 앞에서 읽을 때 아이들은 효신을 재수없어하며 뾰족한 시선만을 보낸다. 그렇게 고립되던 효신은 다시 태어나기를 희망하며 옥상에서 떨어진다.


    효신이는 졸업 했을까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스틸컷

      효신이가 살아서 학교를 다녔을 그 시기와 내가 학교를 다녔던 시기는 대충 세어봐도 10년 이상이나 차이가 난다. 그렇지만 효신이네 학교 시설은 우리 학교랑 정말 비슷하고(우리 학교가 좀 오래된 학교긴 했다), 반 아이들의 말이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보고 있으면 내 친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생각해낼 수 있을 정도로 영화 속 배경과 내 학창 시절의 기억이 비슷했다. 특히 조금이라도 시끌벅적하지만 평화로운 반 분위기에 균열이 나타나는 조짐이 있으면 바로 그곳으로 죄다 고개를 돌리는 행동은 그 시기, 무심하면서도 예민했던 우리들을 표현하기에 딱이었다.

      우리 학교는 지어진지 오래됐고, 게다가 사립학교인 만큼 무척 보수적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절대 금기사항이었다. 이성애 섹슈얼리티도 그런데 하물며 학교 선생님들이 동성연애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경우는 거의 못 본 것 같다. 그나마 선생님 한 분이 '그런 일이 가끔 있었지~' 하고 애매하게 말을 마무리했던 것만 기억이 난다. 우리는 모두 '레즈비언'이라는 존재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것이 우리들 안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알았지만 모두 그런 것은 없는 체 했다. 어디선가 들리지만 '당장', '내 눈앞에는' 보이지 않는 그것. 이미 졸업한 언니들에게나 일어났던 사소한 해프닝. 다 가짜인 것처럼 가볍게나 떠들 수 있었던 것. 학교를 떠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어렴풋이 '아 그 때 그게 그런 거였구나', 심심하게 짐작할 뿐인 것.

      내가 학교를 떠난지도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제 나는 더 이상 학교와 관련이 없는 사람이다. 나는 미성숙하거나 어리다고 말 할 수 없는 나잇대에 들어와 있고, 보호를 받기보다는 책임을 져야할 것들이 늘어나고 있는 사람이다. 고등학교 친구들과도 정말 가끔 만나 과거를 추억할 뿐이다. 문득 나는 효신이를 생각한다. 효신이는 학교를 떠날 수 있었을까? 아니면 지금도 학교 옥상에 남아 무심한 듯 남들을, '정상적인' 남들을 관조하며 삶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효신이가 어서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Designed by Tistory.